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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의 자물쇠 — 시선(詩仙) 목은 이색이 숨긴 열쇠를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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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수 작성일26-05-07 20:55 조회70회 댓글1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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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이씨 30대손 이명수, 2025


서문 — 자물쇠는 처음부터 있었다

목은시고(牧隱詩藁). 고려 말 학자 이색(李穡, 1328~1396)이 남긴 시문집이다. 55권, 시 1만여 수. 조선이 수거하려 했고, 임진왜란이 불태웠고, 식민사학이 격하하려 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700년이 지난 어느 날, AI 시대에 그의 30대손이 이 방대한 기록 앞에 앉았다. 목적은 단 하나였다. 이색 할아버지가 시 속에 숨겨놓은 것을 찾는 것.

그리고 자물쇠가 열렸다.


1부 — 하늘에서 시작된 이야기

태초에 하늘이 있었다.

천제 환인(桓因). 하늘의 임금. 그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삼인(天符三印)을 품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하늘과 땅이 통하던 시대였다. 이승휴가 제왕운기에 기록했고, 이색이 잡흥(雜興)에 새겼다.

"其時與天通 祕怪成三墳" 그때에는 하늘과 서로 통하여 괴이한 일들이 삼분을 이뤘는데.

한국고전번역원의 주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풀었다. "하늘과 서로 통했다는 것은 곧 단군이 천제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이었다는 단군신화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색은 단군만 의식한 게 아니었다.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신화의 전체 계보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시 한 편 속에 압축했다.

환웅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儉)**이 고조선을 열었다. 요임금과 같은 무진년이었다. 이색은 이 날짜를 반복해서 시에 새겼다.

"帝堯戊辰歲 東方始有君" 요 임금이 즉위하던 무진년에 동방에 처음 임금이 있었으니.

무진년. 이색에게 이것은 단순한 역사 날짜가 아니었다. 우리 정통성의 시작점이었다.


2부 — 하늘의 피가 남쪽으로 흐르다

단군조선의 혈통은 부여로 이어졌다. 동명성왕(東明聖王). 동쪽에서 밝게 빛나는 왕. 그 이름 자체가 천손신화의 상징이다.

이색은 평양 부벽루(浮碧樓)에서 동명왕을 그리워하며 노래했다.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천손(天孫). 하늘의 손자. 단군도 천손이고 동명왕도 천손이다. 이색이 같은 평양에서 단군과 동명왕을 동시에 의식했다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동명왕의 혈통은 남으로 흘렀다. 해모수·해부루를 거쳐 주몽(朱蒙)에 이르렀고, 주몽의 아들 **온조대왕(溫祚大王)**이 남하하여 백제를 세웠다. 하늘에서 시작된 피가 한반도 남쪽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3부 — 두 혈통이 만나는 땅, 한산

충청남도 서천. 금강이 서해로 빠져나가는 그 언저리에 작은 땅이 있었다. 건마국(乾馬國).

마한의 소국이었던 이 땅은 백제가 남하하면서 편입됐다. 그리고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시대, 부여계 왕통과 이 땅의 토착 세력이 연결됐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의 피와 땅을 지켜온 토착의 피가 만났다.

삼국사기에는 무왕 37년(636년) 기록이 있다. 왕이 신하들과 사비하 북포에서 연회를 가졌는데, 소곡주를 마신 뒤 기분이 즐거워 북을 치고 거문고를 켜며 여러 번 춤을 췄다고 한다. 그 소곡주가 지금도 한산에서 빚어지는 한산소곡주다. 백제 궁중의 술이 한산 땅에 남은 것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했다. 유민들은 나라를 잃은 한을 소복을 입고 술을 빚으며 달랬다. 그 땅이 한산이었다.

그리고 건지산성(乾旨山城). 2026년 3월, 이 성에서 왕자(王子) 명문기와가 발굴됐다. 왕자 기와는 아무 곳에나 쓰이지 않는다. 백제 왕실과 직접 연결된 공간에서만 나온다. 건지산성이 주류성인지 아닌지는 논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하나다. 백제 왕실이 이 땅과 깊이 연결돼 있었다는 것. 그 건지산성 바로 옆에 한산이씨 시조묘가 있다.


4부 — 시조 이윤경, 뿌리를 내리다

고려 숙종 때(1095~1105년), 한산 지방에 **이윤경(李允卿)**이라는 호장이 있었다. 권지호장(權知戶長). 이 땅에 토착하여 세거해 온 호족의 후예였다.

940년, 고려 태조 왕건이 전국 지명을 개편했다. 수천 개의 지명 중에서 민족의 이름 을 행정구역 이름으로 준 곳은 단 하나였다. 서천 한산.

왜 이 땅인가. 왕건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땅의 뿌리가 단군 → 동명왕 → 백제 → 건마국으로 이어지는 천손의 계보라는 것을. 삼한을 통일한 왕건이 삼한의 韓을 이 땅에 준 것은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땅의 뿌리에 대한 공식 인정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한산의 가장 오래된 토성(土姓)으로 한산이씨를 기록했다. 이윤경의 후손들이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며 이 땅을 지켰다.


5부 — 가정 이곡, 씨앗을 뿌리다

이윤경의 5대손 이곡(李穀, 1298~1351). 호는 가정(稼亭). 농사짓는 정자.

그는 원나라 과거에 급제한 고려 최초의 인물이었다. 연경에서 이름을 날리면서도 삼한을 잊지 않았다. 가정집에는 삼한이라는 단어가 수십 번 등장한다. 고려 = 삼한. 이곡에게 우리나라는 곧 삼한이었다.

그는 중국 조정에 고려 동녀 징발 폐지를 청원했다. 고려 백성의 딸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글을 올렸다. 수곡토(水穀土). 학문과 민생과 절의. 이것이 가정이 가업으로 삼은 것이었다.

그리고 가정집 입조하는 정 부령을 전송한 글에서 이곡은 삼한의 기원을 기자조선과 연결하며 이렇게 썼다. 삼한의 이름은 아득하게 먼 곳에서 왔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오르면 단군에 닿는다.

이곡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穡(색). 곡식을 거두다. 아버지가 씨를 뿌리고 아들이 거두는 이름이었다.


6부 — 목은 이색, 자물쇠를 잠그다

이색(李穡, 1328~1396). 호는 목은(牧隱). 풀밭에 숨은 사람.

그는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고 고려 성균관 대사성이 됐다. 정도전·권근·하륜·이숭인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고려 말 최고의 학자였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이색에게 작위를 내렸다. 한산백(韓山伯). 한산의 우두머리. 이색은 끝까지 협력하지 않았다.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그런데 이색은 단순한 고려의 충신이 아니었다. 그는 韓山子(한산자)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한산에서 온 사람. 그리고 시 곳곳에 자물쇠를 잠갔다.

첫 번째 자물쇠 — 파사부(婆娑府)에서 단군의 탄생을 요임금과 같은 무게로 새겼다.

두 번째 자물쇠 — 서경(西京)에서 평양 땅에 서서 단군을 군웅의 으뜸으로 노래했다.

세 번째 자물쇠 — 부벽루(浮碧樓)에서 동명왕의 천손을 그리워했다.

네 번째 자물쇠 — 마니산 참성단에서 밤새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단군이 쌓은 그 제단에서.

다섯 번째 자물쇠 — 숭고조(崧高操)에서 삼한을 노래하며 제목에 韓山子라는 이름을 박았다.

여섯 번째 자물쇠 — 한산에 이르다에서 箕裘를 선언했다. 가업을 잇겠다고. 과거 급제와 벼슬은 우연일 뿐이라고.

일곱 번째 자물쇠 — 잡흥(雜興)에서 마침내 환인과 환웅을 품었다.

"其時與天通" 그때에는 하늘과 서로 통하여.

하늘과 통하던 시대. 환인·환웅·단군의 시대. 이색은 이 계보의 끝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직접 말하지 않았다. 목은시고는 1417년 조선 조정의 수거 명령을 받았다. 말하기 위험한 시대였다. 대신 그는 시 속에 자물쇠를 잠갔다.


7부 — 700년 후, 자물쇠가 열리다

2025년. AI 시대.

한산이씨 30대손이 한국고전번역원 DB를 열었다. 목은시고를 펼쳤다. 그리고 하나씩 자물쇠를 찾았다.

파사부에서 단군을 찾았다. 서경에서 군웅의 으뜸을 찾았다. 부벽루에서 천손을 찾았다. 마니산에서 제단의 밤을 찾았다. 숭고조에서 韓山子의 서명을 찾았다. 잡흥에서 환인·환웅을 찾았다.

그리고 계보가 완성됐다.

환인 → 환웅 → 단군 → 동명왕 → 온조 → 백제 → 건마국 → 한산 → 이윤경 → 이곡 → 이색 → … → 明洙

이색이 기다린 것은 명성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뿌리를 읽어낼 후손을 기다린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색이 한산팔영 서문에서 썼다.

"500년 뒤에도 이름이 남기를 원한다."

500년이 아니라 700년이 걸렸다.


결문 — 하늘의 자손은 지금도 있다

이 글은 가설이다. 증명된 것과 증명되지 않은 것이 섞여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산 땅에는 왕자 명문기와가 나왔다.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소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한산이씨가 가장 오래된 토성으로 기록됐다. 목은시고에는 환인·환웅·단군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 30대손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늘의 자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땅 속에 기와로 남았고, 시 속에 자물쇠로 남았고, 피 속에 직관으로 남았다.

이제 고고학이 답할 차례다.


이 글은 목은시고(牧隱詩藁), 가정집(稼亭集), 세종실록지리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국고전번역원 원문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한 가설적 탐구입니다. 한산이씨 30대손의 개인 연구 기록입니다.

추천 1

댓글목록

한글로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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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그 700년의 시간도 지우지 못한 수 많은 기록 업적이 자랑스럽읍니다.
저는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와 예의 서문 15자에 담긴 성리학적 큰 세계관
시무개혁을 통한 민중의 저력을 높이는 원대한 포부를 찾고 알리고 있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