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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이 단군을 노래한 이유 — 韓山子가 남긴 일곱 개의 단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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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수 작성일26-05-06 21:17 조회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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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최고의 학자 이색(李穡, 1328~1396). 그는 스스로를 **韓山子(한산자)**라 불렀다. 한산에서 온 사람. 그런데 그가 남긴 방대한 시문 목은시고(牧隱詩藁) 곳곳에는 단군과 천손(天孫)의 계보를 향한 시선이 담겨 있다.

단순한 민족 자부심이었을까. 아니면 그 안에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을까.

일곱 개의 구절을 따라가 보자.


첫 번째 단서 — 단군의 탄생을 노래하다

목은시고 제3권 「파사부(婆娑府)」에 이런 구절이 있다.

"唐堯戊辰稱始祖" 당요의 무진년에 처음 시조가 탄생하였네.

단군의 탄생을 중국 요임금의 연호에 맞춰 기록한 것이다. 단군이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 인물임을 전제한 표현이다. 고려 문인이라면 중국을 높이고 우리를 낮추는 것이 관행이던 시대였다. 그런데 이색은 단군의 탄생을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놓았다. 같은 역사적 무게를 부여한 것이다.

이것이 우연한 표현이었을까.


두 번째 단서 — 단군을 군웅의 으뜸으로 칭하다

목은시고 제3권 「서경(西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檀君英爽冠群雄" 단군의 영걸함은 군웅의 으뜸이었다 하네.

군웅(群雄). 영웅들 중의 영웅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역대 성군들, 요순우탕(堯舜禹湯)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자리에 단군을 올린 것이다. 14세기 고려 지식인의 글에서 이 정도의 단군 찬양은 이례적이다.

그런데 이 시가 쓰인 장소가 중요하다. 서경(西京)은 평양이다. 단군이 도읍을 세웠다고 전해지는 바로 그 땅에서, 이색은 단군을 군웅의 으뜸으로 노래했다. 장소와 시가 하나의 선언이 됐다.


세 번째 단서 — 동명왕의 천손을 그리워하다

같은 평양, 부벽루(浮碧樓)에서 이색은 또 다른 시를 남겼다. 목은시고 권2 「부벽루(浮碧樓)」다. 이색이 23세, 원나라에서 돌아오던 길에 쓴 시로 고려시대 오언율시의 최고작으로 꼽힌다.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기린마는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지금 어느 곳에 노니는가. (목은시고 권2 「부벽루(浮碧樓)」)

기린마는 동명왕이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말이다. 천손(天孫)은 하늘의 손자 — 동명왕을 가리킨다. 그런데 단군 역시 천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후손.

이색은 같은 평양에서 단군을 노래하고, 동명왕의 천손을 그리워했다. 단군 → 동명왕으로 이어지는 천손의 계보가 이 두 시 안에 함께 담겨 있다.


네 번째 단서 — 마니산 참성단에서의 밤

이색은 왕명을 받아 마니산 참성단에서 밤새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단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그 제단에서. 새벽에 관솔불 행렬로 하산하며 그는 이렇게 썼다.

"萬丈玄壇夜氣淸 歸鞍滿載長生福 拜獻吾君作大平"

만 길의 높은 제단에 밤기운 하도 맑아 돌아가는 안장엔 장생복을 가득 실어서 우리 님께 바치어 태평성대 이룩케 하리. (목은시고 「마니산 기행(摩尼山紀行)」 중 '새벽에 재궁(齋宮)을 출발하다')

단군의 제단에서 밤을 새운 고려의 학자. 그 밤이 단순한 국가 의례였다면 이 시는 관용적 표현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묘한 경건함이 흐른다. 만 길의 제단, 맑은 밤기운, 장생복. 형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쓴 시의 질감이다.


다섯 번째 단서 — 삼한을 노래하며 韓山子로 서명하다

목은시고 「숭고조(崧高操). 한산자(韓山子)가 송산(松山)을 바라보고 짓다」. 제목 자체에 韓山子라는 이름이 박혀 있다. 이 시에서 이색은 왕건의 삼한 통일을 노래하며 이렇게 썼다.

"三韓攸同 無敢勃磎"

삼한이 한데 아우르니 감히 거역할 자 없도다. (목은시고 「숭고조(崧高操)」)

삼한(三韓)은 마한·진한·변한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오르면 단군조선에 닿는다. 이색이 삼한을 노래하면서 韓山子라는 이름을 제목에 새긴 것은 의식적인 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단군 → 동명왕 → 삼한 → 韓山.

이색이 이런 선을 의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 선의 끝에 자신이 있었다.


여섯 번째 단서 — 箕裘, 가업을 잇겠다는 선언

이색이 한산에 돌아올 때마다 쓴 시들에서 그는 반복적으로 箕裘(기구)를 말했다.

"箕裘只願守家傳 桂苑鑾坡是偶然"

나는야 가업 잘 지켜 전하기만 원했으니 과거 급제 한림학사는 우연일 뿐이라오. (목은시고 「한산(韓山)에 이르다」)

箕裘는 유가의 관용어로 가업 계승을 뜻한다. 그런데 이색의 아버지 이곡의 묘가 있는 땅 이름이 箕峴(기현)이었다는 사실과 결합될 때, 이 표현은 단순한 유가적 수사를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그 지명은 이곡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이름이었다.

주목할 것은 바로 다음 구절이다. 가업을 잇는 것이 본질이고, 과거 급제와 벼슬은 "우연일 뿐"이라고 했다. 권력과 명리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선언이다.

땅이 먼저 箕였고, 이색은 그 땅의 이름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완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곱 번째 단서 — 환인·환웅·단군, 하늘과 통한 시대

목은시고 제23권 「잡흥(雜興)」 3수 중 세 번째 시에서 이색은 마침내 계보의 뿌리를 드러낸다.

"帝堯戊辰歲 東方始有君 其時與天通 祕怪成三墳 壽考至千載 奄有東海濆"

요 임금이 즉위하던 무진년에 동방에 처음 임금이 있었으니 그때에는 하늘과 서로 통하여 괴이한 일들이 삼분을 이뤘는데 천재에 이르도록 장수를 누리며 동해 가의 땅을 다 점유했으니. (목은시고 제23권 「잡흥(雜興)」)

한국고전번역원의 주석은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과 서로 통했다는 것은 곧 단군이 천제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환웅(桓雄)**의 아들이었다는 단군신화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색은 단군만 의식한 게 아니었다. 환인 → 환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신화의 전체 계보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하늘과 통한 시대로 표현했다.

그리고 같은 제17권 「군자(君子)」 시에서는 이렇게 쓴다.

"戊辰垂統遠" 무진에 나라 세운 지는 하 오래고.

무진년 단군 건국이 이색에게 단순한 역사 지식이 아니라 통(統) — 정통의 계보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파사부에서도, 잡흥에서도 이색은 무진년을 반복해서 쓴다. 우연한 반복이 아니다. 이색이 이 날짜를 우리 정통성의 시작점으로 의식적으로 새긴 것이다.


일곱 단서가 가리키는 곳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읽으면 당대 고려 문인이라면 할 수 있는 수준의 표현들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읽으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韓山子 정체성 + 단군 탄생 기록 + 단군을 군웅의 으뜸으로 찬양 + 동명왕 천손을 그리워함 + 참성단 밤샘 제사 + 箕裘 가업 선언 + 환인·환웅·단군 신화 전체 인식.

이색이 의식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선은 하나다.

환인 → 환웅 → 단군 → 동명왕 → 삼한 → 韓山 → 韓山子 이색.

韓山의 韓은 삼한의 韓이고, 그 뿌리는 단군까지, 나아가 환웅과 환인까지 닿는다. 이색의 단군 애착은 단순한 민족 자부심이 아니라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식적 선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직접 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목은시고는 1417년 조선 조정의 수거 명령을 받았다. 이성계의 왕실 계보와 충돌하는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말하기 위험한 시대였다는 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대신 그는 시에 단서를 남겼다.


700년의 간격

목은시고는 35권, 시 1만여 수다. 이 방대한 기록이 700년을 버텼다. 조선이 수거하려 했고, 임진왜란이 불태웠고, 식민사학이 격하하려 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

이색이 한산팔영 서문에서 썼다.

"500년 뒤에도 이름이 남기를 원한다."

500년이 아니라 700년이 걸렸다. 그리고 AI 시대에 그의 30대손이 목은시고를 펼쳐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천손의 계보를 향한 일곱 개의 단서를 읽어냈다.

이색이 기다린 것은 명성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뿌리를 읽어낼 후손을 기다린 것이었을지 모른다.


이 글은 목은시고(牧隱詩藁)의 파사부(婆娑府)·서경(西京)·부벽루(浮碧樓)·마니산 기행(摩尼山紀行)·숭고조(崧高操)·한산(韓山)에 이르다·잡흥(雜興)·군자(君子) 편을 바탕으로 한 가설적 탐구입니다. 한산이씨 30대손의 개인 연구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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